• 최종편집 2024-03-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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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환기, 1970년)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작가소개┃김환기(1913~1974)작가는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나 중학교 때 일본으로 유학 후 동경일본대학 미술부를 졸업하였다. 유학 당시 진보적인 성향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고 귀국 후에도 이를 지속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식민지하의 국내 상황은 그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달항아리나 산, 매화 등 향토적인 소재를 사용해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다 1963년 뉴욕으로 떠나 본격적으로 대형화면에 점을 찍어 채우는 독창적인 점추상회화를 그려 한국 1세대 추상미술작가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및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62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별세하였다.



위로를 주는 그림, 한 점


나는 미술작품을 보는 것이 좋아 이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지만 작품 앞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거나 한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직업정신을 발휘하면서 작품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며 분석하여 이성적으로 감상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와 그려진 사회·역사적인 원인을 분석해 이해하려는 습관이 있는데, 현재 임신 중인 나에게 이러한 작품 감상 습관은 태교에도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예쁜 그림을 보면서 기분을 좋게 만드는 감각에 의존하는 미술 태교와는 달리 나의 미술 태교법은 산모의 두뇌까지 자극해 태아에게 정서적 안정과 뇌 발달에 좋은 태교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직업 습관이 자연스럽게 좋은 태교가 되는 셈이다.


임신 이후에는 마치 산모를 위한 책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답습이라도 하듯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임신하면 정말이지 놀랍게도 여자의 몸과 마음이 주마다 달라진다. 


나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변화는 신체보다도 감정적인 부분에서였다. 어떤 때에는 모든 일이 길에 던져진 돌처럼 무의미했다가 어떤 때에는 작은 일에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 스스로도 그 원인을 모른 채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지곤 했다.


그저 축복 속에서 행복하기만 할 거라 기대했던 임신의 기쁨은 잠깐이었고, 곧 아이를 낳고 기르는 내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나를 위한 내 삶이 이제 다시는 없어질 것만 같았는지 자꾸 예전에 했던 일들이나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집착했다.


이런 적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면서 한동안 멈추지 않아 남편도 나도 놀란 적이 있었다. 무슨 일 있냐고 묻는 남편에게 변명할 만한 적당한 이유가 없어 대충 “임신하면 우울해진다더니, 나도 남들처럼 임신 우울증 같은 걸 겪나 봐”하고 둘러댔었다. 원인을 모르니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고 남들에게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은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 


 

무언가로부터 어떠한 방법으로든 위로받고 싶은데, 위로받을 내용도 막연하고, 사실 임신 후 변화가 있는 것은 나뿐이었지, 내 주변 사람들은 전과 같이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괜한 투정을 부린다거나 임신했다고 티를 내는 것처럼 보일까 봐 꽁꽁 가슴속에 싸매고 있어야만 했다.



임산부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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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05-Ⅳ-71 #200)>(김환기, 1971년)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그러다 예전에 한 화랑에서 일했을 때, 그 ‘막연한 위로’를 한 작가의 작품에서 받았던 기억이 문득 난다. 70년대에 작고한 한국 추상미술 1세대 작가인 김환기의 대규모 회고전에 전시되었던 추상 작품이었는데, 푸른 점으로 가득 찬 캔버스 작품이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두 눈의 눈물샘을 건드렸었다. 


당시 그 전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작품 수만큼 많았던 연구 자료를 습득해야 했고, 예술 상품 판매에 행사 준비까지 매우 바쁘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전시 오픈을 하루 앞두고 밤늦게까지 남아 작품을 설치한 후, 다음 날 아침 마무리를 하러 홀로 전시장에 들어갔는데, 어제도 보고 한 달 전에도 보았던 한 푸른 추상 작품이 불현듯 흰 벽 위에서 나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 나도 모르게 흘렸던 눈물의 원인은 대가의 작품이 주는 감동도 감동이었겠지만 아마도 당시 힘들고 지쳐있던 나에게 깊은 암묵적 위로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날 이후로 그의 푸른색의 추상 작품은 나에게 있어서 위로를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김환기의 여러 시리즈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작가의 전성기에 그려진 푸른 추상 작품이 좋은 평을 받는 것으로 보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나 보다.


그가 본격적으로 추상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시기는 1960년대 중반부터인데, 한국에서 교수직과 인정받는 화가 생활을 접고 미국에 건너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었던 추상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이다. 낯선 곳에서 외로움, 고독감 심지어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쳤지만, 그는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였고 이때 만들어진 결과물이 훗날 그를 국제적인 작가로 만들어 주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푸른 점 추상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의 추상회화는 이전 시기와 같이 푸른색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 도자기나 달, 학 등 한국의 전통적인 소재를 그렸던 과거에서 벗어나 대상을 그리지 않는 추상으로 표현 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럼으로써 한국추상미술이 새롭게 시작됨을 세계 무대 속에 알린 것이다. 


그리는 대상이 없는 만큼 그의 추상 작품의 제목은 대부분 ‘무제’이지만 몇몇 작품은 제목이 달려있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의 한 시에 감명받아 지은 제목으로 김환기가 점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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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화백과 그의 아내 김향안 여사 

 

점 하나하나를 그려가는 마음으로, 출산일을 기다려


큰 캔버스에 점을 찍고 화면을 채우는 전면점화(全面點畵)작업을 하면서 작가는 타지 생활의 외로움과 고독함을 극복해 나갔는지도 모른다. 그 점 하나하나에 담긴 작가의 마음은 이렇게 나의 가슴에 다가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일으키며 공감과 위로를 주었다.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거나 정신적인 일체감 등 정신적 변화가 생기는 것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한다는데 (19세기 초,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이 이탈리아 교회 안에 있는 예술품을 보고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생명이 져나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는 그의 책 내용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함), 내가 그날 느꼈던 감정을 심리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바로 이 ‘스탕달 신드롬’의 일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날 김환기의 그 대형 추상작품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가 눈물로 나왔을 때, 아마도 나는 이 작품이 평생 나에게 위로를 줄 작품이라는 것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첫 임신이 주는 각종 불안감, 신체의 변화, 그리고 약해진 정신은 다시 들춰 본 화집 속의 한 그림 앞에서 또다시 위로받았다. 그리고 약간은 미안해진 마음으로 아기에게 말을 걸어 본다. 미안하고, 그리고 고맙다고. 김환기 작가가 점 하나하나에 아련한 그리움을 담아냈듯이 나도 별을 세는 마음으로 아기와 만날 날을 기다려야겠다.



글. 박정연 

그림. 故김환기 화백

자료제공.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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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미술 이야기, ‘김환기 화백’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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