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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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는 길, 아름다운 배웅 ‘조문보(弔問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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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나 돌잔치와 같이 기쁜 자리는 그저 축복만 해주면 되지만, 장례식은 그렇지 않다. 죽은 사람의 삶을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자리다. 갑자기 날아든 비보, 늦어도 발인 전에는 가야하니 시간이 빠듯하다. 늦은 밤 퇴근하고 얼굴이라도 비추면 다행이다. 조의금이나 조화로 인사를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 추모는 어렵다.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니 당연한 것일까. 형식만 남아버린 장례에 경종을 울리는 작은 종이가 있다. ‘조문보(弔問報)’다. 고작 4쪽에서 8쪽짜리 ‘조문보’는 고인, 유족, 조문객 모두에게 의미 있는 장례식을 만들어준다.
달라진 죽음
의학의 발달로 생명 연장은 실현됐지만,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순 없다. 웰빙을 넘어 웰다잉(존엄사)이 거론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두렵고 슬픈 것’에서 ‘아름답고 소중하게 갈무리해야 하는 삶의 마지막 단계’로 달라지고 있다. 장례문화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사전의료의향서’와 ‘사전장례의향서’를 쓰기 시작했다. 상업화되고 천편일률적인 장례문화에 새바람이 분다. ‘조문보’ 역시 그중 하나이다. 기록으로 하는 추모다. 동시에 조문객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초대와 감사의 인사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천상병) 중 일부 발췌
협동조합 은빛기획은 부고를 받으면 유족을 인터뷰한다. 서면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고인의 출생, 가족관계, 학업, 사회이력 등을 묻는다. 마치 이력서 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의 이력도 포함된다. 고인이 운명한 때와 장소 그리고 장례식, 발인, 장지 관련 내용을 적어 보내면, 작가는 고인의 일생을 짧은 글로 정리한다. 6~7시간이면 장례식장에 조문보가 도착한다. 밤에 글을 쓰는 경우도 있고, 장례식장 인근 인쇄소를 찾지 못해 발을 구를 때도 있다. 하지만 실수는 절대 안 된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고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짧은 장례식, 긴 위로
협동조합 은빛기획은 2013년에 만들어져 자서전 사업과 ‘내 삶 쓰기’ 사업 등 삶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2014년부터 조문보도 만든다.(www.mylifestory.kr) 조문보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은빛기획 노항래 전 대표다. 노 전 대표는 50대 중반 한창 나이에 막역한 친구를 떠나보냈다. 형식만 남고 아무것도 없는 장례식이 싫었다. 조문보는 고인과 유족에게 건네는 선물이었다. 유족에게 어떤 위로보다 더 큰 위로가 됐다.
김석주 님은 철도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한 투쟁에 앞장섭니다. 뜻이 강한 만큼 시련의 날은 깊고 길었습니다.
94년 2월 해고되었고, 10년 동안 철도노조 해고자로 생활합니다. 2004년 10년 만에 복직됩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발목 잡았습니다. 2006년 편도암을 확인했습니다.
병고는 깊어졌고, 기어이 2014년 3월 28일 운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택에서 요양 중이던 밤, 각혈을 확인하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침 동트는 시각 운명하셨습니다. 가족, 동료,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사랑하듯 살아낸 이가, 자신의 몸에 깃든 암세포를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 故 김석주 님의 조문보 중 일부 요약 발췌
“故 김석주, 나의 친구였어요. 20대 중반에 노동운동을 하다가 만난 한 살 터울 형이에요. 구로동에서 아래윗집 살던 이웃사촌이기도 했고요. 형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 형의 일생을 정리해보았어요. 형수에게 사진을 몇 장 받고, 제가 알고 있는 형의 살아온 이야기를 담았어요. 그게 첫 조문보에요.”
장례에 의미를 찾아
미망인이 된 형수는 너무 고마웠다. 조문객도 조문보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가져갔다. 조문보가 있어 의미와 감동이 있는 장례식이 됐다. 그 후로 은빛기획은 100여 개의 조문보를 더 만들었다. 조문보에는 고인이 살아온 이야기, 고인이 남긴 유언 등을 기록했다.
그중에 화제가 된 것은 故 신해철 씨 조문보였다. 첫날 2,000부, 다음날 5,000부, 장례가 끝난 후에도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로부터 조문보를 찾는 연락이 이어졌다. 故 백남기 농민의 조문보는 자그마치 2만 부를 배부했다. 단일 조문보로는 가장 많은 양이다. 그밖에도 위안부 할머니, 故 노회찬 대표의 조문보 등도 제작했다.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진 않는다. 의뢰가 들어오는 대로 만들고 있다. 처음에는 지인들이 만들었고, 나중에는 알음알음 알고 의뢰가 들어왔다. 아직 체감할 만큼 확산되진 않았다. 하지만 노 전 대표는 조문보가 언젠가 대중화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남은 사람들이 고인의 삶을 회상하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게 장례 본연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생전에 치루는 장례식, 거품을 뺀 ‘반값장례’ 등 다양한 시도가 있어요. 비용도, 규격도 점점 작아질 거예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형식보다는 의미를 찾는 장례로 변하지 않겠어요?”
이만하면 잘 살았다!
막상 장례 절차가 시작되면 정신없다. 슬픔과 충격에 빠져 조문보를 만들 생각도 못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조문보에 관심이 있고 부모 또는 자신의 삶을 기록해두고 싶은 사람은 생애보를 만든다. 생애보를 간직하다가 조금 고쳐 조문보로 쓴다.
“우리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세요. 생애보를 만들어드렸더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르신들은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기록하고 싶어 해요. 말하고 기록하며 우는 분들도 계세요. 하지만 그 자체가 힐링이죠. 슬펐던 일도 지나간 일이 되거든요. 슬픔에 빠지기보다는 ‘이만하면 잘 살았다’며 스스로 만족하더라고요. 도리어 아무도 날 기억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요. 그래서 누군가 내 삶에 대해서 듣고, 기억하고, 관심 갖는다는 사실에 위로받는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자기 삶을 기록할 수 있는 ‘인생노트(해피엔딩노트)’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엔딩노트’는 이미 보편적인 상품이다. 수백 종의 ‘엔딩노트’가 있다. 인생노트, 생애보, 조문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삶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우리도 지금의 50~60대들이 본격적으로 자기 삶의 마무리를 고민할 시점이 되면 기록은 더 활발해질 거라 예상해요. 우선 지금 어르신들에 비해 활자에 대한 친숙도가 높아요. 그리고 고도성장을 일궈온 세대이기에 자신의 삶과 그 과정에 느껴온 회한에 대해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훨씬 커요.”
“슬픔을 나누며 위로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유족 드림
포토그래퍼. 김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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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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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레즈비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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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소수자 인구는 최대 500만 명. 성적으로는 상대적 소수일지 모르지만, 결코 적은 인구가 아니다. 성소수자는 ‘다르다’는 편견을 가진 이들에게 밝히는 30대 레즈비언의 평범한 일상.
김 씨가 흔하듯 성소수자 역시 그렇다
어느 비혼주의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여러 친구가 모인 자리에서 “너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 폭력일 수 있다고. 사실 그녀에게는 말하지 못할 여자친구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무상에게 누군가 그런 질문을 했다면 그녀는 당당하게 “난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토익강사이자 레즈비언 콘텐츠 크리에이터 ‘기무상’은 대한민국에 사는 평범한 레즈비언으로서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 그녀의 닉네임 역시 이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예전에 비해 인식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있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성소수자 역시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대한민국에 가장 많은 성이 김 씨이듯, 레즈비언 역시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존재라는 것을 알리고자 책을 쓰고 영상을 만드는 거죠.” (기무상)
실제로 기무상의 연인, 가제루상은 <커밍아웃북>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당당히 레즈비언임을 밝혔다. 이후 팟캐스트에서 성소수자에 관련된 콘텐츠를 다루던 그녀는 보다 많은 독자를 만나기 위해 유튜브로 영역을 확장시켰다.
기존 팟캐스트에서는 목소리로만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지만, 유튜브로 옮기자 다양한 콘텐츠가 가능해졌다. 이에 연인인 가제루상과의 일상, 먹방을 올리거나, 성소수자 인터뷰 등 널리 공감할 수 있는 방송을 하고 있다.
“퀴어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면서 특히 60대 레즈비언 ‘윤김명우’님을 인터뷰한 것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카메라 장비를 동원할 정도로 큰 공을 들였던 인터뷰이기도 하고, 직접 연락드리고 설득했으니까요. 실제로 만나 뵈니 인터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 보수적이었던 70년대 한국사회에서 스스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던 이야기를 들을 땐 맘이 짠하기도 했죠. 그녀의 인생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어요. 다행히도 현재는 조그만 펍을 운영하며 잘 살고 계세요. 저는 이 영상을 오래도록 다른 사람들이 많이 봐줬으면 해요.” (기무상)
기무상이 퀴어 미디어 콘텐츠를 기획할 때 가장 많이 신경 쓰는 것은 데이터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도 꾸준하게 찾아볼 수 있는 유익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퀴어 미디어가 상당 수 증가했다.
그녀는 지금 퀴어 미디어가 급성장하고 있는 시기라 생각하고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이에 큰 책임감을 안고, 대한민국에서 성소수자가 인정받는 날까지 더 많은 공부와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스승과 제자 또는 친구이자 연인
촬영 내내 영락없는 닭살커플 티를 팍팍 냈던 기무상과 가제루상. 이 둘은 토익학원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나 2년 가깝게 연인으로 지내고 있다. 애교가 넘치는 지금과 달리, 당시 가제루상은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수업만 듣다 가는 학생이었다고. 하지만 기무상은 묵묵히 열심히 공부하는 그녀의 모습을 눈여겨봤다. 그러다 둘은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찾아 함께 권투를 시작하면서 친해졌다.
“옆에서 보면 기무상은 참 성인군자 같아요. 제가 철이 없는 편인데도 옆에서 잘 돌봐주고, 방송에 달린 악플을 하나하나 읽으면서도 흥분하지 않더라고요. 반대로 기무상 방송의 독자들이 집으로 선물이라도 보내는 날이면, 저는 질투가 나서 평소보다 더 격하게 운동을 해요. 화도 내고요. 그럼 기무상은 차분하게 제 기분을 풀어줘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저도 웃어요.(웃음)” (가제루상)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가제루상은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자신이 레즈비언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자유롭고 편견 없는 그녀에게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기무상은 중학교 때 처음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알았다. 그리고 친오빠에게 커밍아웃했는데, 예상과 반대로 오빠는 큰일이 아니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직 부모님께는 제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50년대 생인 분들이니 이해하지 못하실 수 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어떤 경로든 부모님이 제 활동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커밍아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기무상)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나름대로 생각이 깨어있다고 자부하던 에디터 역시 그동안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카페에서 수다 떨 듯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생각보다 순조로웠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범한 커플인데 말이다. 기무상은 앞으로도 더욱 평범한 성소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고, 가제루상은 그 옆에서 지금처럼 귀엽게 장난치며 그녀와의 사랑을 키워갈 것이다.
포토그래퍼. 윤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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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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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로스 증후군, 가족을 잃은 슬픔을 해결하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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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구성원이며 일상의 감정을 공유하는 대상, 반려동물. 이러한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오는 상실감은 정신질환으로
연결될 만큼 큰 것이다. ‘펫로스 증후군’은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통한 상실감이 원인이 되는 질환이다. 반려동물 천만 시대, ‘펫로스
증후군’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위로받지 못하는 슬픔
1980~90년대에
반려동물이라 하면,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반려동물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주거환경의 변화로 집 안에서 키우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반려동물의
의미는 더욱 각별해졌다. 더불어 1인 가구와 고령화에 따라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도 늘어났다.
해마루케어센터의 김선아 센터장은 “2000년도 초반에 반려동물 붐이 일었었다. 그때 분양받았던 동물들이
이제 가족을 떠났거나 떠나기 시작하면서 최근 ‘펫로스 증후군’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라며 “당시에 분양받았던 동물들이 ‘첫 반려동물’인 경우가 많아 애정이 각별한데 반해, 이별에 대한 대처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라고 전했다.
특히, 반려동물을
잃었을 때, ‘동물이 죽었다고 뭐 저렇게까지…’라는 사회적
시선이 남아 있다 보니, 슬픔을 정상적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러한 상태가 병적인 심리상태로 이어져 ‘펫로스 증후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감대 형성 중요
‘펫로스
증후군’은 단순히 키우던 동물을 잃은 슬픔 이상의 상실감을 가져온다.
우울증과 유사한 식욕부진, 무기력, 수면장애
등이 주요 증상이다. 지난 2012년 부산에서는 한 40대 여성이 펫로스 증후군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이에 대해 김선아 센터장은 “펫로스 증후군은 혼자 슬픔에 갇혀 있기보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이들을 찾아 대화하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주변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대상을 찾기 어려울
경우, 관련 동호회나 모임에 참가하거나 정신과 진료를 추천한다”라고
조언했다.
펫로스 증후군은 타인의 시선에 움츠러들고 소통하지
않으면 더욱 악화되는 병이다. 이에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찾아 함께
극복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문. 해마루케어센터
김선아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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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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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 윤영분 씨의 러브스토리 “장애는 사랑으로 감싸 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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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장애 2급 장애인인 박정우 씨는 ‘컴퓨터 조립’종목에서 2011년 서울과 2016년 프랑스 보르도 대회까지 2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능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의 곁에는 그의 아내 윤영분 씨가 있었다.
“견딜 수 있는 아픔은 이미 아픈 게 아닌 거잖아요. 그냥 아팠던 거지요”
취재진은 박정우 씨와 아내 윤영분 씨를 만나기 위해 용인의 한 카페에 도착했다.
박정우 씨는 행사 일정 관계로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아내인 윤영분 씨가 먼저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윤 씨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림픽보다 멜로드라마에 빠지다
아내 윤영분 씨는 남편 박정우 씨가 연락도 없이 약속 시간까지 오지 않는다며 초조해했다. 그런 윤 씨에게 “괜찮다”며 함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편한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을 풀었다. 10년을 넘게 살아도 항상
전화하고 남에게 폐를 절대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윤 씨의 모습이 진실해 보였다. 윤 씨는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섬세하고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남편이 18살 때, 병이 찾아왔어요. 사고도 아니고 자고 일어나니까 몸이 아프기 시작한
거죠. 당시 어머님이 시어머니의 간호를 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하시다가 뒤늦게 심각한 병임을 아시게 된
거예요. 양방, 한방에 굿판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대요. 이미 뼈 마디마디에 염증이 생겨 관절이 녹아내리는, 죽음보다 더한
아픔을 견디며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모습이 되었어요. 그렇게 남편은 고통을 견디면서 ‘제발 다리는 자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대요. 결국, 무릎을 잘라 인공관절을 심었고 대퇴부까지 병마가 침투해 오른쪽 고관절까지 인공관절로 치환해야 했어요.” (윤 씨)
한 집안에 환자가 둘이었으니 박 씨 가정의 경제적인 사정은 매우 어려워졌고, 박
씨는 작은 방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 병원에서 신약 임상시험 권유를
받았고 다행히 신약이 몸에 맞아 증세가 호전되었다.
하지만 정상으로 돌아오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결국, 척추가 녹아 휘어서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2급 중증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렇게 육체의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박 씨와 마음의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윤 씨가 만난
것은 무궁화전자에서였다.
“무궁화전자는 직원 대부분이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세요. 그곳에 사무직 직원으로 취업한 저는 정상인이었기에 그런 분위기가 낯설었고 몸이 아프다는 게 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들을 보며 저 자신이 점차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약을 한주먹씩 먹으면서도 보약이라며 웃어 보이는 분, 기저귀를 차고앉아서
일하며 그로 인해 또 질환에 시달려야 하는 분. 온갖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도 쾌활함을 잃지 않는 이들을
보면서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생각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 거예요. 저들은 평생 짐처럼 자신의
아픈 몸을 견디며 살아가는데, 사지 멀쩡한 저는 제 머릿속 생각을 지워버리면 그만인 거잖아요.” (윤 씨)
그런 환경 속에서 유독 윤 씨에게 환한 빛같이 다가온 이가 있었다. 유독
눈빛이 초롱초롱 맑게 빛났던 남편, 박정우 씨였다. 컴퓨터를
비롯해 각종 기기에 훤히 밝은 박 씨는 윤 씨가 사무일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환한 미소로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졌고 어느새 연인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제가 남편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는 저를 아끼는 주변 분들이 울면서 반대했어요. 무서운 병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생 병수발 들면서 살 거냐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남편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도요. 남편이 저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요. 안 아픈 거 말고 다른 행복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요. 그때 전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윤 씨)
인간 박정우의 삶에 매료되다
윤 씨와 이야기하는 중에 박정우 씨가 도착했다. 박 씨는 2층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휠체어에 의지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청와대
일정이 늘어나서 미처 전화할 수가 없었다며 굉장히 미안해했다. 한 눈에도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의 박
씨를 대면하자 금세 분위기가 밝아졌다.
“아내를 만나 안정된 삶을 찾았어요. 혼자
살면서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려웠는데, 아내가 제 인생의 대들보가 되어주었어요. 저를 꽉 잡아주는 고마운 존재에요. 아내와 함께 살며 처음으로 아내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던 때가 기억나요. 너무나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가 볼에 뽀뽀를 해줬어요. 그때 감동해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어요.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요.” (박 씨)
그렇게 부부는 12년을 함께 살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이유가 되었다. 물론 다른 부부들처럼 의견차이도 있고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서로의 사랑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2달의 한 번씩 박 씨가 맞는 독한 약들을 생각하면, 항상 정신이 번쩍 들고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새삼 깨닫는다고 한다.
“몸이 불편하긴 하지만, 아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생활할 수 있게 부지런히 움직여요. 집안일도 많이 하려고 노력해요. 아내는 깔끔한 성격이라 집안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거든요. 저는
아내 덕분에 더 깔끔해졌고 아내는 저와 살면서 좀 더 여유로운 성격이 되었어요.” (윤 씨)
윤 씨는 남편인 박 씨가 남을 잘 배려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혼자가 아닌, 다 같이할 수 있는 일을 항상 생각한다고 한다. 윤
씨가 보여준 박 씨의 메모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아픔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아픔을 기억하지만, 마음속까지 상처를 남기면 안 된다. 몸이
장애를 입었다고 정신까지 장애를 입으면 안 된다” - 박정우 메모장
삶 자체가 금메달
2016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린 제9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박정우 씨. 2011년 서울에서
열린 제8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에 이어 2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을 준비하고 출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저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좋아요. 이번 프랑스 올림픽에서는
갑자기 대회 재료들이 바뀌어 많은 참가선수가 당황했죠. 하지만 저는 그런 상황이 오히려 재밌었어요. 새로운 방식을 찾아 창의적으로 하면 되니까요.” (박 씨)
박 씨의 금메달은 박 씨만의 것이 아니다. 그 옆에서 더 힘든 과정을
이겨냈어야 했을 아내 윤 씨와 함께 이뤄낸 성과인 것이다. 윤 씨는 지나치게 일에 몰입하는 남편이 항상
염려스럽다.
“참 신기한 게 남편은 어느 순간에도 노여워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요. 실낱같은 희망만 있어도 크게 웃을 줄 아는, 영혼이 맑고 순수한
사람이에요. 죽음의 직전까지 갔고 두 달에 한 번씩 약을 먹으면서 엄청난 고통을 견디면서도 삶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잃지 않아요.”
(윤 씨)
작년 가을, 부부는 새로운 모험을 떠났다. 함께 문경새재 정상에 올라간 것이다. 윤 씨는 남편을 만나기 전
등산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남편을 만나고 등산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문득 ‘안 될 이유가 뭐지?’라는 생각이 윤 씨에게 들었다. 부부는 타인의 도움을 모두 만류하고 두 사람만의
힘으로 5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2분 가고 1분 쉬고 하는 식이었다.
“정상에 올라 어머니에게 영상통화로 전화했어요.
이 멋진 광경을 보시라고요. 이 산의 정상에 당신의 아들이 올라와 있다고요. 이 좋은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면 얼마나 억울했을 뻔 했냐고요. 땀을
엄청나게 흘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단풍이
정말 장관이었어요.” (박 씨)
19년을 함께 보듬고 살아온 부부.
물 한 잔도 상대를 위해 먼저 떠주는 부부는 소박한 삶을 함께 나누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
이후 아내 윤 씨에게 메일이 한 통 왔다. 윤 씨가 보낸 글 안에
에디터는 담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그에게 물었어요.
그 아픔을 어떻게 견디느냐고.
남편이 그러데요.
아픔은 견디는 게 아니라고.
그 말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맞아요.
견딜 수 있는 아픔은 이미 아픈 게 아닌 거잖아요. 그냥 아팠던 거지요.
언론에서 항상 하는 얘기가 있지요.
“장애를 극복하고…”
하지만 그 사람이 늘 하는 얘기가 있답니다.
장애는 극복되는 게 아니라고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장애는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해요.
남편은 장애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에 몸을 맞춰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 같아요.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셨어요?”라는 질문이
참 가혹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뼈 마디마디가 녹아내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뎠냐”고 묻는 질문 자체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포토그래퍼 윤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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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