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품 좀 팔아본 나지만, 휴양지는 거의 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있을 때 더 많이 걷고, 그렇게 더 많은 곳을 다녀보자는 생각에서다. 사서 고생을 하는 편이라
지금은 젊을 때라야 가능한 여행을 하고 노년에 들었을 때 휴양지를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내가 괌에
발을 들이고 생각이 바뀌었다. 말로만 듣던 유토피아가 거기에 있었다.
깨끗한 물로 씻어낸 섬
호텔에서 바라본 괌의 도시 야경. 물로 씻어낸 듯 아름답다
비행기는 밤하늘을 가르고 나를 외딴섬에 내려놓았다.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바라본 창밖. 어둡지만 높은 건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공항에 발을 들여놓는데 후텁지근했다. 온몸에
달라붙는 뜨거운 기운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휴양지라더니 첫인상은 별로네’ 볼멘소리가 입안을 맴돌았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호텔에 도착했다. 밤이 꽤 고요했다.
이른 아침, 알람도
없이 눈이 떠졌다. 젖혀놓은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방안은 전등을 켜놓은 것보다 몇 배로 밝았다. 창가로 다가가 호텔
밖 풍경과 마주했다. “아. 다르구나!” 어제의 푸념이 감탄으로 바뀌었다. 그저 하늘이, 그리고 몇 채의 건물과 해변이 보일 뿐이었데, 달랐다. 밤새 절대자가 이 섬의 곳곳을 깨끗하게 물로 씻어낸 것만 같았다.
자연스레 발걸음은 밖으로 향했다. 건물 하나하나가 지금 막 채색을 끝낸 모형처럼 고유한 색깔을 뽐내고 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사람이 많지 않은 거리도, 길 양옆에 그림처럼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도,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자동차들도 신기하리만큼 말끔하고 예뻐 보였다. 크게
이국적이거나 낯설지도 않은 풍광이 지나치게 맑은 공기와 더해지니 낯선 이상의 느낌을 선사했다.
휴양지는 그저 신혼이나 노년의 부부가 해변을 바라보고
앉아서 물에 발을 담근 채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활동적인 내겐 맞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 여정은 빽빽한 빌딩이 숲을 이루는 도시나 고색창연한 마을,
천혜의 자연이 숨겨진 트레킹 코스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내가 괌에 도착한 첫날, 잠시의 산책만으로 휴양지 매력에 빠지다니. 신념이 강할수록 하나만
무너지면 나머지는 도미노 블록이 넘어가듯 순식간이다. 괌에 있는 동안 나는 아낌없이 감탄사를 뱉어냈고, 내 카메라는 사방을 향해 쉼 없이 셔터 막을 열어 풍광을 기록했다.
투명이라는 설명으로 부족한
괌의 여정은 맑음으로 시작해서 맑음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통 ‘맑다’는 표현을 하면 물을 떠올린다. 투명한 물은 유리알 같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섬의 물은 투명한 유리알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괌 최고 명소인 ‘사랑의 언덕’에 갔을 때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바닷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인데 사방은 심하리만큼 푸르고 물은 첩첩산중의 약수보다 맑았다.
언덕으로 향하는 길, 보이는 난간마다 가득하게 매달린 자물쇠가 일부러 멋을 낸 장식처럼 알록달록 예뻤다. 청명한 하늘과 대비돼 유명 작가의 조형물처럼 그럴듯해 보였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이렇다. 괌이 스페인 식민지였던 시절, 한
스페인 장교가 아름다운 원주민 여인에 반해 결혼을 강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그녀는 연인과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져 둘만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이후 이곳은 사랑의 언덕이라 불리며 수많은 연인의
성지가 되었다. 이곳을 찾은 연인들이 난간에 걸어둔 알록달록한 자물쇠가 그들의 사랑을 기리면서 자신들도
그런 사랑을 하겠다고 약속한 상징처럼 보여 애틋하다.
해변으로 내려가 봤다. 휴양지의 여유가 이런 것일까. 그 누구의 얼굴에도 고민이 담겨 있지
않았다.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는 나만 짊어지고 온 것일까. 북적이지
않는 해변에서 시간을 멈춰놓고 쉬는 듯 여유로운 사람들이 부러웠다. 해변에 가득한 인파로 물 반 사람
반의 진풍경이 펼쳐지는 우리네 피서지 풍광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걸음마다 감동하는 휴양지 초보를 위한 신의 배려였을까. 하늘 한편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봤던 무지개는 보통 하늘에서
희미하게 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론에 충실한 괌의 무지개는 육지에서 출발해 하늘 위로 정확하게 포물선을
그린다. 무지개마저도 이곳에선 흔한 것인지 아무도 신기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시즌에 따라 다르지만, 휴양지엔 음악 공연이나 원주민의 퍼포먼스 같은 이벤트가 많다. 내가
괌을 찾았던 시기엔 이곳 사람들에게 유명한 가수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공연이 어디서 열리는지 확인해보니
괌 원주민이 가장 많이 찾는 공원이란다. 일정 비용을 내고 입장하는 실내 공연장이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볼 수 있는 공원, 그리고 무료 공연이었다.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해 공원을 찾아가 봤다. 공원 가운데 마련된 무대에는 대낮부터 연습이 한창이었다. 파마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무대 앞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던 아이들과 가끔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며 “이따가 와. 지금은 연습 중이니까 재미없어”라고 말하며 아는 척을 해줬다. 처음 보는 그인데 여행자인 내 눈에도 여간 다정할 수가 없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어스름이 내리면서 비가 쏟아졌다. 내 공연도 아닌데 괜히 걱정됐다. ‘사람들이 많이 올까?’ ‘공연은 취소되지 않을까?’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공연을 기다리던 내가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공연은 대단했고 어둠이 가득한 공원은 사람들의 열기와 함성으로 들썩들썩했다. 비가 쏟아졌지만,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거기에 모인 모두가 빗속에서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나도 덩달아 어깨를 실룩거리다가 그 인파 속으로 들어가 봤다.
마치 음악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주인공들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밴드를 이끌어 가다가 벽에 부딪히지만 결국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내 멋진 공연을 해낸다는 내용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흥겨움이 비단 음악의 리듬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나와 그곳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늘, 구름으로 그린 그림
‘아픈
몸을 치료하는 곳은 병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곳은 휴양지’라는
생각이 들고 꼬박 4일이 지났다. 이제 하룻밤만 더 보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수십 번 비행기에 몸을 싣고도 단 한 번 가보지 않았던 휴양지인데, 어느새 다른 어떤 나라를 떠날 때보다 아쉽게 느껴졌다. 휴양지에
대한 나만의 편견을 내려놓은 뒤 여정은 걸음마다 힐링이 되었다.
마지막 저녁은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서 만찬으로
계획했다. 근사했던 며칠간의 시간이 오래오래 기억나도록 일몰을 보면서 식사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결정이 괌 여행의 화룡점정이 되어주었다. 며칠간 보았던
괌의 일몰과 또 다른 풍경이 내게 근사한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태양이 바다 서쪽에 걸리기 전부터 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하얀 구름이 말 그대로 뭉게뭉게 모이면서 바다에 반사된 빛과 함께 묘한 색을 만들어 냈다. 식사가 나오기도 전부터 내 눈은 바다로 향했고, 난 석고상처럼 가만히
멈춘 채 하늘 위에 구름이 그리는 그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절정은 상상보다 대단했다. 보통의 일몰은 태양이 수평선에 걸려 붉은빛을 물 위에 흩뿌리며 사라지는 것을 최고로 친다. 하지만 괌에서 본 일몰은 구름 속에서 펼쳐졌지만 어떤 곳과 비교해도 환상적인 풍광을 연출해냈다. 판타지 영화에서 천국의 입구를 형상화할 때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푸르렀던
하늘이 무지개에서 색을 뽑아내 구름 위에 형형색색의 작품을 그렸다. 난 그저 감탄사만 연발했다.
그날, 저녁
메뉴로 뭐가 나왔는지도 모를 만큼 괌의 작별 인사는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괌에서의 추억은 내게 휴양지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어 주었다. ‘다음은 어떤 곳에서 어떤 휴식을 가질 수 있을까’ 휴양지라는 이름만 들으면 이제 떠나기 전부터 기대가 생긴다.
글/사진. 이두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