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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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대표하는 두 가지. 바로 골목과 인왕산이다. 인왕산 아래 골목 사이사이로 서촌의 속살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그리고 마침내 서촌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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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방향의 시작, 영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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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청와대 방향으로 길을 걷다 보면 듬직한 문 하나를 만난다. 경복궁의 영추문이다. ‘가을을 환영하는 문을 뜻하는 영추문은 이름마저 멋스럽다. 계절의 어떠한 풍경과도 잘 어울리는 영추문은 자세히 살펴보면 쓸쓸한 세월의 흔적이 서려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문이 무너져 박정희 대통령 때, 복원하게 되었는데, 그때 성급하게 복원한 나머지 문에 문제가 생겨나고 있었다. 영추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 콘크리트가 새어 나와 누렇게 변색한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모른 채 지나친다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제대로 알고 나니 깊은 안타까움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문화재 복원 기간이 최소 15년인데 비해 한국은 고작 3, 4년이라고 한다.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노력이 변화해야 함을 간절히 느낀다.

 

 

근현대 예술가들의 집합소, 보안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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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여관이라는 간판을 본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건물을 지나간다. 낡은 적갈색 벽돌 무늬의 여관 모습이 마치 아직 영업하는 곳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청와대 길의 독특한 랜드 마크이기도 한 보안여관은 과거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전해진다.

 

서정주 시인, 이중섭 화가 등 당대 문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던 보안여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들이 이곳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는다. 젊은 청춘 시절의 그들은 어땠을까.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며 그 젊음을 소비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현재 이곳은 한 예술단체에서 매입해 복합 문화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여관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아쉽지만, 한쪽 창문을 통해 독특한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어 그래도 위안이 된다.

 

 

서촌의 골목을 지키는 故 이상범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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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큼직한 대로변을 지나 인왕산을 향해 가다 보면 골목 깊숙이 오래된 집 한 채가 보인다. 한국 산수화의 대가로 불리는 청전 이상범 화백의 가옥이다. 43년 동안 이상범 화백과 그 가족들이 살았던 이곳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이 되어있다. 가옥 옆에는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작업실 겸 화실도 나란히 존재한다. 가옥의 현판을 마주한 채로 바라보는 하늘 풍경은 가히 예술이다.

 

한옥의 처마를 프레임 삼아 멀리 보이는 나무의 잎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춤을 춘다. 겨울이 다가왔음에도 나무는 여전히 초록빛을 띠고 있다. 이 나무는 바로 회화나무인데 과거에는 선비 나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늦겨울이 되어서야 나무의 색깔이 점차 변하는데, 그 곧고 변함없는 모습에 반한 옛사람들이선비 나무라는 별칭을 붙였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나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현판에 쓰인 누하동천(누하동의 천국 같은 곳)이 진리인 것만 같다.

 

 

그림 같은 풍경을 한눈에, 인왕산의 수성동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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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놓은 풍경이 서울에 있다는 게 믿어지는지? 인왕산 아래 수성동 계곡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곳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바로 수성동 계곡 일대이다. 이러한 모습이 가능해진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이다.

 

원래는 이곳 인왕산 아래에 옥인 시범 아파트가 자리해 있어 계곡의 절경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아파트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수성동 계곡 복원 논의가 나오게 되었고, 마침내 2011년에 이르러서야 계곡의 자연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기린교라고 불리는 계곡 아래 돌다리는 겸재 정선의 그림 <장동팔경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 같다.

 

현재 수성동 계곡은 그 미적 가치를 인정받아 풍경 자체가 문화재로 선정된 최초의 곳이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조선 시대 화폭 속의 모습을 똑같이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촌에 있는 셈이다. 계곡을 둘러보며 경치 감상을 하다 내려오면, 피곤해진 몸을 쉬어갈 정자, 사모정이 나온다.

 

옛사람처럼 정자에 앉아 땀을 식히며,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서울 풍경을 눈에 담아본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도시의 건물들이 오늘따라 싫지만은 않다. 북적이는 사람들, 바쁜 도시와 잠깐 이별을 고한 채 서촌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왔기 때문은 아닐까. 겨울이 코앞에 다가온 오늘, 서촌에서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포토그래퍼. 권오경

도움말. 설재우, <서촌방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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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서촌을 탐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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