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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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외각의 언덕마루에서 내려다 본 로마 전경

 


바람이 불었다. 아니 사실은 불지 않았다. 분다고 생각하니 부는 것 같았다. 볼에 와 닿는 바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역시 마음에서만. 너무 따듯해서 왈칵 눈물이라도 날 것 같다. 그랬을 리 없는 겨울인데. 바람이 불지 않는 추운 계절, 난 따듯한 손길에 동요됐다. 감정은 마음이 바라는 대로 상상했고, 그 상상은 현실인양 추억을 조각했다.

 

 

삼겹살 파는 로마의 푸줏간

 

요즘은 해외여행이 늘었다. 고작 몇 박 며칠, 길면 10여 일. 하지만 어디를 가든 한 곳에서 한 달 넘게 머물게 되면 그땐 여행이 아니라 생활을 해야 한다. 두 달 이상이라면 집을 구하고, 때로 식사도 만들어서 먹어야 한다.

 

이탈리아 로마에 머문지 막 한 달이 지났을 때, 난 근처에서 유일하게 한국식 삼겹살을 살 수 있는 시장 구석 푸줏간과 저렴하지만 내 입맛엔 딱 맞는 빵집, 말은 거칠게 하지만 덤은 많이 챙겨주는 주인장이 운영하는 채소가게를 수첩에 하나씩 적어가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 가도 음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어라고 말했던 내가, 중국 상인이 잔뜩 모인 시장에서 한국 음식 맛을 낼 수 있는 재료들을 사다가 집에서 요리를 만들어 먹을 줄은 몰랐다. 사실 내가 머물던 숙소 인근엔 한국 음식점도, 요리 재료를 파는 상점도 있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내가 자주 찾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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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판테온 앞에서 노래하던 거리의 성악가
 

콜로세움을 지나야 갈 수 있는 재래시장 안에 한국식 삼겹살을 파는 푸줏간이 있었다. 소개를 받아서 알게 된 곳인데, 터키 사람인 젊은 주인장은 한국에서 노동자로 생활한 적이 있는 친구였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 생활권에서, 오늘도 삼켭살 먹커요?”라며 어설픈 한국어를 건네면서 고기를 잘라주는 그가 여간 반가울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탈리아에서 삼겹살 부위를 구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했다.

 

더욱이 대부분의 고기를 기계로 잘라서 파는 그곳에서 칼로 썰어서 줘야 하는 삼겹살은 번거롭고 불편하다고. 돈은 안 되지만 알음알음 정보를 듣고 한국 사람들이 찾아오니 그게 좋아서 팔고 있다고 했다. 자주 와서 매번 조금씩만 샀는데, 얘기를 듣고는 그가 번거로울 것 같아 그날은 한 번에 잔뜩 샀다. 고기를 싼 비닐이 두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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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지나다닌 콜로세움은 익숙하지만 늘 새로운 곳이었다


고기를 사서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이것저것 다른 먹을거리를 구입해 쇼핑카트에 묵직하게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의 매일 지나는 콜로세움 앞에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원래 365일 사람의 발길이 넘치는 곳이지만 무슨 행사를 하는지 옷까지 맞춰 입은 사람들이 한 무리 서 있었다. 자유 시간인 듯 분주하게 움직이며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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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내부를 찍은 사진을 많이 못 본 것 같아 몇 번을 찾아가 여러 번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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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뒤편에 서 있던 외로운 나무

 

 

같은 장소, 추억이 다른 사람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시장에 온다고, 씻지도 않고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나온 난 그들과 한눈에 비교됐다. 얼마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나도 저들과 같은 마음으로 처음 보는 콜로세움을 한 장이라도 더 사진에 남기려고 했는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우리지만 그들과 내가 느끼는 추억은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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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는 동전에도 각각의 의미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 트레비 분수


이곳에서 수년간 살았던 것도 아닌데 이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될 하루를 난 너무 뻔하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외출할 때 카메라를 들고나오지 않은 것도 꽤 되었다. 부리나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언제 떠날지 모를 이곳에서 오늘 하루가 가장 소중한 추억의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집에 도착해서 사가지고 온 음식 재료를 냉장고에 넣고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를 들고나왔다.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의 입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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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다니며 촬영한 사진.
이 사진은 '동상이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그게 안 됐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거리. 몇 번은 다녔을 로마의 명소 코스들. 로마 안내 서적에 빼곡히 소개된 피자집이며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새롭게 느끼려 한다고 새롭게 보이지는 않았다. 며칠간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을 찾아다녔다. 관광 지도에는 표시도 잘 안된 실선으로 그려진 곳을 다니며 골목을 배경으로, 잡초가 무성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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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마루에서 넓게 촬영한 로마 시내는
높은 건물 하나 없어 고요하다

 

그렇게 사방을 헤매다 찾아간 곳이 언덕 너머 마을이었다. 사실 로마 지도엔 표기도 안 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이름은 잘 모른다. 어느 날 아침콜로세움을 지나 직진으로 계속 가면 어디가 나올까하는 생각으로 찾아간 곳이었다. ‘진실의 입을 지나서 다리를 건너면 고양이들만 사는고양이 공원이 나오고 거기서 한참을 걸어 언덕을 만나면 로마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마루까지 길이 나 있었다.

 

언덕마루를 지나서 내리막을 따르면 낯선 마을이 하나 나오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곳이 내가 좋아하는 촬영지면서 휴식처가 되었다. 특히 언덕마루를 지날 때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로마 전경을 즐겨 찍었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로마 시내와 구름의 풍경이 사진 찍기에 너무 좋았다.

 

 

마음이 좋아야 추억도 좋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간다고 해도 사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만큼 누구와 가느냐, 언제 가느냐, 그날의 날씨는 어땠느냐, 내 마음은 어땠느냐 등이 중요하다. 때로 후자들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더 크게 만들기도 하고 전혀 아름답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크게 다투고 헤어졌던 추억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아름다운 명소라고 해도 아름답게 느껴질 리 없는 이유다. 더욱이 그날 을씨년스럽게 흐리고 비라도 내렸다면, 추억을 가진 사람은 그곳을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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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성당이 서 있는 포폴로 광장은
로마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가급적 좋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긍정적인 생각을 했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았다. 사실 사진 찍으러 나가면서 목적지가 없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무엇을 찍어야 할지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 역시 별로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그래서 신기할 게 전혀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사진에 담겠다는 마음처럼 설레는 건 없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피사체도 보는 각도가 달라졌고, 대상과의 거리가 달라졌고, 함께 담아낼 수 있는 배경이, 잘라 담는 구도가 달라졌다. 좋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예약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다음날부터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근처 슈퍼마켓에서 큼지막하지만, 가격은 저렴한 빵과 음료, 치즈 하나를 샀다. 그게 다시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온종일 내가 먹을 수 있는 식사의 전부였다. 사실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발걸음은 분주했지만 새롭지 않은 시선에는 셔터를 잘 누르지 않게 되면서 사진을 별로 안 찍는 날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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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앞에서 졸고 있던 날 깨워준 꼬마

 

그날도 사진은 거의 찍지 못했던 날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해서 콜로세움에 다다르자 졸음이 확 쏟아졌다.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아마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날톡톡건드는 것 같아 눈을 떴다. 눈앞에 한 꼬마가 나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뭐라고 떠들다가 자신의 아빠에게로 달려갔다.

 

그 녀석의 표정을 사진에 담아놓고 보니 문득 궁금했다. ‘이 녀석은 나를 어떻게 추억할까분명히 바로 잊었을 게 뻔하지만 내게 이 꼬마는 그날 가장 생생한 추억이 됐다. 좋은 추억이라고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란 걸 알았다.

 

 

감정이 조각하는 추억이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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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대표 유적지 포로 로마노와 구름의 조화가 아름답다

 

로마를 떠나오기 전날, 몇 달간 머물면서 찍었던 사진을 하나씩 살펴봤다. 난 보통 날짜별로 폴더를 만들어서 사진을 정리한다. 날짜 뒤에는 그날의 동선이나 기억을 떠올려 제목으로 달아놓는다. 한참이나 한 장의 사진도 찍지 않은 날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도 몇 백 장이 넘는 사진을 찍은 날도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진이 찍혀 있다고 모든 사진이 기억에 남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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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광장을 내려다 보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동상
 

어디서 왜 찍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종일 몇 장의 사진밖에 찍지 않았지만, 그때 어떤 감정으로 이 사진을 찍었는지 생생하게 추억하는 것이 있었다. 신기한 건 그런 사진들은 찍혀 있는 건 단 한 장인데 그 사진을 보면, 그 순간의 분위기와 내 모습, 주변의 사람들, 날씨, 그때 들렸던 소리까지 영상을 보듯 떠올려지는 듯했다. 보이는 것보다 마음이 더 담긴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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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의 무대가 됐던 명소 스페인 광장


이후에 누군가에게 로마 사진을 보여줄 기회가 생기면 두 종류로 분류하게 됐다. 보자마자 모두가 알고 있는 로마가 담겨 있는 사진과 보기만 해서는 모르는 내 설명이 필요한 사진이었다. 난 후자에 더 애착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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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산타젤로 성


내가 없어도 사진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은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찍는 것이지만, 가끔 마음에서 느껴지는 걸 찍게 되면 사진에 담긴 것 이상의 추억이 새겨 있음을 안다. 물론 사진을 찍은 사람만 알고 있으니 사진으로의 가치는 낮겠지만.

 

 

칼럼니스트·포토그래퍼 감성사진사 이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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