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03(일)
 

 

 

 

1.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오타루 운하.jpg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오타루 운하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일본영화를 꼽아보면러브레터는 늘 상위권이다. 우리네 정서와도 잘 맞는 감동, 새하얀 눈으로 채워진 풍경이 영화 내내 잔잔하게 이어져 보는 이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영화의 감동을 따라 오타루와 삿포로가 있는 북해도로 향했다. 눈의 왕국이기도 한 이곳은 겨울이라야 즐거운 것들이 꼭 있다.

 

 

고독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도시

 

삿포로의 첫인상은 푸르렀다. 하늘이 그랬고, 건물이 그랬고, 얼굴에 표정도 핏기도 없는 거리의 사람들이 그랬다. 걷다가 마주치거나 혹 내 옆을 스쳐 지난 사람들은 고독을 연기하는 배우들 같았다. 이상했다.


2. 오도리의 TV 타워는 에펠탑을 닮은 이곳의 랜드마크다 - 복사본.jpg
오도리의 TV 타워는 에펠탑을 닮은 이곳의 랜드마크다


오도리에 있는 NHK 방송국 옆으로 탑 하나가 서 있다. ‘TV 타워라고 부르는데 조금 작지만, 외형은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을 닮았다. 삿포로 TV 방송의 개시를 계기로 건설된 조형물인데 전망대로의 역할과 함께 삿포로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단다.


6. 일본의 여느 도시와도 비슷한 삿포로 중심 거리.jpg
일본의 여느 도시와도 비슷한 삿포로 중심 거리

 

추워서였을까. 타워에서 나와 걷는데 걸음에 흥이 나지 않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저 어딘가에서 따스한 라멘 한 사발 받아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을 떠나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매콤 뜨끈한 국물이 그리웠다.


3. 먹거리 역할을 톡톡이 하는 원조 삿포로 라멘 골목.jpg
먹거리 역할을 톡톡히 하는 원조 삿포로 라멘 골목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지역의 명물이라는 라멘을 찾아 나섰다. 주변 사람에게 묻기를 여러 번, 대로를 벗어난 건물 숲 안쪽으로 라멘가게가 즐비한 골목을 발견했다. ‘원조 삿포로 명소, 라멘 골목이라 고 쓰인 문구가 단골집이라도 찾아온 듯 반갑다. 골목 안 좁은 통로를 따라 라멘집들이 불을 밝히고 낯선 손님을 반긴다. 그중 가장 조용하고 주인장 얼굴도 선해 보이는 집을 골라 안으로 들어섰다.

 

4. 라멘집 주인장은 친절했지만 끝까지 미소 한 번 보여주지 않았다.jpg
라멘집 주인장은 친절했지만 끝까지 미소 한 번 보여주지 않았다

 

뽑기는 일단 성공. 젊은 주인장은 꽤 친절했다. 그런데 이 남자, 웃지 않는다. ‘이 친구도 고독을 연기하는 배우 중 한 명인가?’ 난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넸는데 무표정 대답이 돌아와서 더 이상은 말을 걸지 않았다. 보통은 동그란 얼굴에 미소를 그려 넣고 사는 게 일본인인데, 역시 이상했다.

 

그는 주문하기가 무섭게 라멘 제조에 들어갔다. 미소를 포기한 대신 그는 맛내기 능력을 얻은 게 분명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맛있는 라멘을 먹을 수 있었다. 머릿속에 그렸던 맛보다는 덜 매콤했지만 뜨끈하고 담백한 맛은 고독 연기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이와이 슌지 氏, 다시 봅시다

 

여행은 종종 계획과 달라진다. 아무리 꼼꼼하게 계획을 짠다고 해도 변수란 건 발생한다. 한 번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이거나 해외로 떠나는 여행은 더욱 그렇다. 계획과 달라지는 것 중 가장 빈도가 높은 건 역시 시간이다. 분명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였는데 하루를 지나다 보면 이미 이동해야 하는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 오늘의 태양도, 꼼꼼했던 계획도 점점 산을 넘어간다.


5. 오타루는 일본이지만 일본 같지 않은 이국적인 풍광을 가졌다.jpg
오타루는 일본이지만 일본 같지 않은 이국적인 풍광을 가졌다

 

오타루에 도착한 건 이미 땅거미가 사방을 삼키고 난 시각. 아쉬움은 나 자신을 향한 애잔함으로 바뀌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뿌옇다. 유리창에 깨알처럼 달라붙은 물기를 걷어내니 느닷없이 이국적인 풍광이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사실 여행지로 홋카이도를 선택한 건 순전히 이와이 슌지 감독 때문이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홋카이도의 오타루는 기대하고 고대하던 곳이었다. 들뜬 가슴도 잔잔하게 만들어내는 자기식 감성창조자 이와이 슌지 감독이 사랑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골수팬을 만들어냈던 영화러브레터와 순수한 사랑을 맛깔나게 담아낸하프웨이가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영화 속 그 방죽을 걸어보고 싶었고, 그들이기에 아름다웠던 거리를 사진에 담아보고 싶었다. 분주한 여정의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마음만은 오롯한 하루처럼, 일주일처럼 잔잔히 느끼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바삐 걷고 뛰었다. 누군가 날 본다면 정해진 목적지로 줄달음하는 모양새였을 것이다. 분주한 움직임에도 카메라의 셔터는 아끼지 않고 눌렀다. 난 어디를 갈 때면 그곳이 자주 가는 곳이라고 해도 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순간 나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려 한다.

 

예를 들면 그날 날씨와 내가 마주친 사람들의 특징, 그곳의 향기, 그때 들었던 음악, 내가 탔던 자동차의 번호판 등 그 시간 내가 그곳에 있어야지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데이터화한다. 그런 나였는데, 생전 처음으로 오타루를 떠나면서난 오늘 이곳에서 아무것도 담아가지 않겠어. 충분히 담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서 곧 다시 올 테니라는 다짐을 했다. 대충 스케치하듯 도시를 사진에 담아놓고내가 오타루에 갔었는데~”라고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울 만큼 그곳은 아름다웠다.

 

 

엘사 히메의 겨울왕국은 고독해

 

오타루에 도착했을 때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점점 대단해져 갔다. 눈이 많다는 홋카이도였지만,이 정도일 줄을 몰랐다. 다행히 이번 여정의 마무리는 스노보드. ‘올 테면 얼마든지 와라하는 오기가 들었다. 솔직히 스노보드를 탄다기보다는 보드에 서 있는 정도의 실력이면서.

 

9. 하얀 눈과 알록달록한 스노보드 데크가 예쁜 조화를 이룬다.jpg
하얀 눈과 알록달록한 스노보드 데크가 예쁜 조화를 이룬다

 

보드를 타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겨서 리프트에 올랐는데 곧바로!’하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리프트 위에서 슬로프를 내려다보니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다. 애니메이션에서나봄직한 비현실적인 설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위를 질주하는 스키어와 보더들의 숫자였다. 없어도 너무 없다.


10. 고요한 리조트에 이따금 활기를 불어 넣는 학생 단체.jpg
고요한 리조트에 이따금 활기를 불어넣는 학생 단체


한국에서 스노보드를 타다가 넘어지면 몇 초도 되지 않아 양옆으로 끊임없이 스키어와 스노보더들이 지나간다. 자칫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슬로프에 사람이 많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바닥의 눈보다 그 위의 사람이 더 많을 때도 있을 정도.

 

7. 북해도에는 많은 리조트가 있는데 대부분 한적하다고 한다.jpg
북해도에는 많은 리조트가 있는데 대부분 한적하다고 한다


슬로프 정상에 올라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지에 섰는데 정말 고요하다. 실력이 없으니 내려오면서 여러 번 넘어졌다. 하지만 뒤에 올 사람과 부딪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때로는 크게 넘어져 한참 동안 누워있어 봤는데 역시나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다른 슬로프에서도 이따금 옆으로 지나가는 스키어가 위협적이기보다 반가움이 들 정도였다.


11. 일본 리조트는 스키나 보드를 타다가 넘어져도 부딪힐 일이 없다.jpg
일본 리조트는 스키나 보드를 타다가 넘어져도 부딪힐 일이 없다

 

일본 스키장을 찾는 이들은 이런 맛에 온다고 한다. 몇 명의 일행과 왔지만 유일하게 실력이 없는 난 계속 혼자였다. 한 번 무리에서 이탈하고 나니 몇 시간이 지나도록 일행과 마주치지 못했다. 슬로프 중간에 누워 있어도 사람이 잘 지나가지 않는 곳이니 무리지어 다니는 일행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데크를 어깨에 메고 한참을 걸어서 내려와 봤다. 계획에도 없던 설산행을 하는 기분이다. 왜인지 삿포로에서 느낀 그들의 고독이 내가 느끼는 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외롭지 않았다. 누군가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14. 못 타는 보드지만 고독하게 즐길 수 있어 좋았다 - 복사본.jpg
못 타는 보드지만 고독하게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그저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걷다가, 또다시 보드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혼자여서 더 즐거웠다. 남들이 볼 땐 외롭고 고독해 보일지라도. 이곳 겨울왕국엔 영어 잘하는 엘사 공주가 아니라 일본어 발음으로에루사 히메(ひめ)’가 살고 있을 것 같았다.


8. 눈이 계속 내리는 가운데 풍광은 점점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jpg
눈이 계속 내리는 가운데 풍광은 점점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12. 자고 일어나 보니 창밖으로 유화 한 폭이 걸려 있었다.jpg
자고 일어나 보니 창밖으로 유화 한 폭이 걸려 있었다


눈 덮인 겨울왕국은 넓고 화려했다. 사실 스키장의 천국인 일본은 숫자도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지만, 시설이나 규모도 대단하다. 내가 머물던 곳 역시 슬로프만 합쳐도 37개 코스에 42km라니 놀라웠다.


13. 눈 내리는 리조트의 조명 아래서 스키 타러 와서 썸 타던 연인 - 복사본.jpg
눈 내리는 리조트의 조명 아래서 스키 타러 와서 썸 타던 연인


홋카이도에서의 고독은 고스란히 즐거움으로 남았다. 그리고 달력을 넘기며 언제일지 모를다음을 자꾸만 곱씹게 하는 버릇을 만들어줬다. 가깝지만 가깝지 않고, 우리와 닮았지만 다름이 많은 일본. 겨울의 홋카이도는 한 번쯤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포토그래퍼 이두용

BEST 뉴스

전체댓글 0

  • 01353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일본 홋카이도 영화 ‘러브레터’로 걸어 들어가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